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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치숙 (1938년 ) - 황석영 작가 한국 명단편 101 - 4번째

by JeromeEugeneMorrow 2024. 9. 2.

채만식의 치숙은 정말 읽다보면 히히덕 거리면서 읽게 된다. 치숙이라는 단어는 어리석은 아저씨라는 뜻이다. 작중 화자는 조카이며, 친척 아저씨가 사회주의자인데 1인칭 시점으로 계속 독백을 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도통 이해가 안간다. 사회주의가 좋은것이면 나라에서 권장을 할텐데 권장을 하지도 않는 것이고, 아저씨는 죽을 병에 걸렸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그를 위해 아내가 얼마나 정성스러운 간호를 했는데 그에 대해 미안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사회주의같은걸 하고 있으며, 자신은 절대로 사회주의 같은 거 이해도 안가고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서 살것이며, 조선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드디어 서른셋 먹은 사회주의자 아저씨와 대화를 하는 장면이 이 소설의 백미이다. 주인아저씨에게 당신 왜 이렇게 못났냐? 그깟 사회주의 뭐가 좋은거냐, 아저씨는 아씨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이런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풀어놓고 아저씨는 말이 안통하는 이 조카에게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다가 결국은 설명도 포기하고 만다. 

황석영작가는 해설을 통해 이 작품이 아이러니를 이용한 풍자라고 이야기한다. 채만식 작가는 카프와도 떨어진 중립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작가가 시대적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순수문학파들이 채만식 같은 작가를 용납할 수 없었다고 비판한다.

황석영작가는 앞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희극적으로 그려져서 더욱 눈물겨운 비극적 아이러니라면, 치숙은 가치가 전도된 비극적 현실이 조카의 입을 통해서 희극으로 변하는 아이러니라고 설명한다 황석영 작가 해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작품의 조카와 고모부는 서로를 투영한 타자의 '거울'을 통해서 원주민의 소외를 드러내고 있는데 프란츠 파뇽은 이러한 소외와 부재를 식민지 사회의 '심인성 장애'라고 썼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의 묘미는 조카카 위선의 아저씨를 신랄하게 까대는 장면과 동시에 조카의 무지함을 어찌해결할 수 없는 인텔리의 답답함을 재미있게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식민지 시대에 쩔어살고 있는 조카이다보니 식민지성에 쩌들어 살아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사회주의자 아저씨는 아무것도 안하고 '바빠서 원...'라는 말로  자신의 무능함을 변호한다. 그러자 조카가 요샛말로 직진을 하는걸 보자 

사람 속 차릴 여망없어요. 그저 어디로 대나 손톱만치도 쓸모는 없고 남한테 사폐만 끼치고 세상에 해독만 끼칠 사람이니 머 하루바삐 죽어야 해요. 죽어야 하고, 또 죽어서 마땅해요. 그런데 글쎄 죽지를 않고 꼼지락꼼지락 도로 살아나니 성화라고는 내....

조카에게 팩폭을 당하고 있는 아저씨의 표정이 궁금해지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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